
LIFE
퇴근 후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꼭 대화를 나누거나 친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노트북을 켜고, 누군가는 밀린 이메일을 정리하고, 또 누군가는 오래 미뤄둔 일을 붙든다.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서로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이 낯선 만남은, 요즘 ‘어드민 나이트’와 ‘각할모’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번지고 있다. 혼자 할 일을 왜 굳이 함께하는지, 그 새로운 연결의 방식을 들여다본다.
말없이 함께하는 사람들

출처 : stockCake
울산의 한 위스키 바에서 지난봄부터 정기 모임이 열린다. 참석자들은 술잔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각자 노트북을 켜고 미뤄둔 일을 한다.
부산 영도구의 한 서점은 매주 목요일 저녁 일곱 시에 사람을 모은다. 10분 안내, 90분 몰입, 20분 공유. 정원은 여섯 명이고, 준비물은 일기와 가계부, 정리하지 못한 이메일이다.
이러한 모임을 ‘어드민 나이트(Admin Night)’라고 한다. 행정 잡무를 뜻하는 어드민과 밤을 붙인 말이다. 영미권 매체들은 이 모임을 새로운 북클럽이라 부른다. 북클럽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여기서는 아무도 같은 것을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요일 저녁의 펍

출처 : CNN
지난 1월 CNN이 뉴욕의 두 사람을 소개했다. 벤자민 칩먼과 니키타 수리가 그 주인공. 두 사람은 매주 화요일 저녁, 와이파이와 콘센트가 있는 펍에서 만난다.
그들의 모임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다. 만난 직후 10분에서 15분쯤 근황을 나눈다. 그다음 각자 오늘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확인한다. 지침을 정하고 타이머를 맞춘다. 그리고 흩어져 각자의 화면으로 들어간다. 벤자민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니키타는 이메일을 정리하거나 이력서를 손보거나 힌디어를 다시 공부한다.
대상이 되는 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고, 반복되며, 어렵지는 않은 일. 병원 예약과 보험료, 공과금 납부와 서류 작성, 구독 해지와 일정 정리 같은 것들이다. 서로의 일을 대신해 주지도 않는다. 같은 시공간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화면에 몰입하는 것이 이 모임의 전부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뉴욕의 벤자민과 니키타뿐만 아니라, 한국 도심 곳곳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서점에서, 바에서 각자 할 거 합시다

출처 : Unsplash
국내에서는 올해 봄부터 ‘각할모’라는 키워드의 모임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각자 할 거 하는 모임’의 준말인 이 모임이 열리는 곳은 카페와 독립서점, 공유오피스와 스터디룸, 그리고 위스키 바까지 다양하다.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는 참가자들이 실명 대신 닉네임을 쓴다. 짧게 근황을 나눈 뒤 두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가져오는 일감은 여행 계획부터 영상 편집, 취업 준비, 학교 과제까지 제각각이다. 운영자들은 한 번 하겠다고 입 밖에 낸 일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생긴다는 점을, 그리고 두 시간 내내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는 광경을 보며 이런 공간이 필요했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한다.
경기 김포에서는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며 고립감을 느낀 사람이 커뮤니티를 열었다. 운영 원칙은 분명하다. 긴 네트워킹이 아니라 각자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경기 안산의 공유오피스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한 이는 같은 시간에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동기부여가 됐다고 전했다.
오프라인만도 아니다. 줌이나 구글 미트에 접속해 카메라만 켜둔 채 대화 없이 각자 할 일을 하는 소모임도 여럿 운영되고 있다. 참석자 연령은 스물둘부터 서른여섯까지 넓게 퍼져 있다. 대학생과 직장인, 프리랜서가 뒤섞인다.
느슨한 연대, 가벼운 감시

출처 : Gentle Monster
한 참가자가 남긴 말이 이 모임의 원리를 가장 짧게 설명한다. 누가 직접 보는 건 아닌데 계속 지켜보는 느낌이 있다는 것.
심리학에는 이를 설명하는 개념이 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촉진’(social facilitation)이다. 타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수행이 올라간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현상으로 어드민 나이트를 분석했다. 다른 하나는 ‘바디 더블링’(body doubling)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미뤄둔 일에 착수하기가 쉬워지는 효과를 가리킨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상담심리학 교수 즈비 벨린은 이렇게 정리했다.
“동일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정해 함께 일할 때 집중력과 실행력이 높아진다.” _즈비 벨린
다만 운영에는 조건이 붙는다. CNN이 인용한 임상심리학자 드브라 키센은 산만함을 줄인 공간을 고르되 참여자 본인이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조언한다. 행정코치 로빈 노드마이어는 명확한 지침을 설정하되 모호한 부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두 조건이다. 적당한 시선과 분명한 규칙. 부산 서점의 10분과 90분과 20분은 그 두 가지를 시간표로 옮겨 놓은 셈이다.
서로를 몰라도 충분한 저녁

출처 : prima-vera.it
스터디카페에 모여 누구는 토익 문제집을, 누구는 이력서를 붙든 채 두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를 ‘조립식 소속감’이라 불렀다.
어드민 나이트가 밀린 잡무를 다룬다면 각할모는 자기 계발 쪽에 가깝다. 매개는 다르지만 형식은 같다. 같은 자리에 있되 서로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여섯 명이 앉은 서점, 닉네임으로만 부르는 카페, 대화 없이 켜져 있는 화상회의 창. 예전의 저녁 약속이 서로를 알기 위한 자리였다면, 지금의 저녁 약속은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한 자리가 됐다. 그 자리에서 오가는 것은 근황 몇 마디와, 두 시간 동안 아무도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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