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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에도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숨어 있다. 어느 나라에서 자랐는지부터 어떤 농장에서 생산됐는지, 어떤 품종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가공됐는지까지. 길고 낯설게만 보였던 원두 이름을 하나씩 읽어 보면, 한 잔의 커피가 어디에서 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길고 긴 원두 이름, 대체 무슨 뜻일까

출처 : @lottegrs.designcenter
롯데GRS의 브루잉 브랜드 스탠브루는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 과테말라 등 싱글 오리진 여덟 종을 운영한다. 각각의 산지마다 개성이 확실한 커피를 음미하다 보면 문득 길고 긴 원두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평소에는 고소한 맛, 산미가 있는 맛, 디카페인. 셋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부지기수. 과테말라, 케냐 등 산지 이름 뒤에 붙은 말들은 대체 무슨 뜻일까.
이름은 주소다

출처 : @haciendalaesmeralda
원두 이름은 국가에서 출발해 세부 지역, 농장, 품종, 가공 방식으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이름표로 된 주소라고 할 수 있다. 업계가 강제하는 규격은 아니지만 스페셜티 씬(Scene)에서는 사실상의 표준으로 쓰인다.
‘파나마 보케테 하시엔다 라 에스메랄다 게이샤 워시드’라는 이름을 열어 보자. 파나마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말한다. 보케테는 치리키주의 화산 고지대, 그러니까 어떤 땅에서 자랐는지를 의미한다. 하시엔다 라 에스메랄다는 누가 수확하고 골랐는지에 해당하며, 게이샤는 무엇을 심었는지, 즉 어떤 품종인지를 의미한다. 맨 뒤의 워시드는 그 열매를 어떻게 가공했는지 알려 준다.
가공 방식은 크게 셋이다. 점액질을 씻어내고 말리는 워시드 공법을 거친 원두는 깔끔한 산미가 특징이며, 커피 열매째 말리는 내추럴 공법을 거치면 농익은 베리류의 단맛과 발효취가 남는다. 점액질을 일부 남기는 허니는 그 중간 지점이라고 보면 되겠다. 원두명 앞의 세 단어가 ‘어디서’라면, 뒤의 두 칸은 ‘무엇을 어떻게’인 셈이다.
60만 달러짜리 커피의 이름

출처 : Prefect Daily Grind
커피 이름을 읽을 줄 알면 사상 최고가의 근거도 읽힌다. 앞서 소개한 하시엔다 라 에스메랄다의 워시드 게이샤 로트는 2025년 8월 ‘베스트 오브 파나마’ 경매에 나와 심사 점수 98점을 받았다. 20킬로그램짜리 한 로트가 킬로그램당 3만 204달러, 총액 60만 4,080달러에 두바이의 로스터리 줄리스 커피에 낙찰됐다. 커피 경매 사상 최고가다.
주목할 것은 같은 농장의 다른 로트다. 내추럴 게이샤는 97점에 킬로그램당 2만 3,608달러, 라우리나 품종은 8,040달러였다. 가공법과 품종만 달라졌을 뿐인데 값이 수천 달러 넘게 움직인 것이다.
다만 이 값을 그 커피의 정가로 읽으면 곤란하다. 같은 농장에서 같은 품종을 같은 방식으로 가공해도 값은 해마다 움직인다. 커피는 한 해 농사의 결과물이라, 비가 언제 왔고 꽃이 언제 폈고 수확기 날씨가 어땠는지에 따라 컵에 담기는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름에 적히지 않는 요소도 있다. 바로 양이다. 경매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한 로트의 크기가 커질수록 값은 오히려 떨어진다. 그해 그 정도 수확량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값의 일부인 셈이다.
언제부터 커피에 이름이 붙었을까

출처 : allianceforcoffeeexcellence
커피가 처음부터 주소를 달고 팔린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커피는 나라 이름 하나로 거래되는 원자재에 가까웠다. 브라질산, 콜롬비아산. 그 안에서 누가 어느 비탈에서 길렀는지는 값에 반영되지 않았고, 물을 이유도 없었다.
문법이 바뀐 시점은 생각보다 최근이다. 1999년 브라질에서 컵 오브 엑설런스가 처음 열렸다. 국제커피기구를 비롯한 기관들이 자금을 댄 이 대회는 농장 단위로 좋은 커피를 가려내는 기준을 세웠고, 커피 업계 최초의 온라인 경매를 열어 우승 로트를 최고 입찰자에게 넘겼다. 거래 단위가 나라에서 농장으로 내려온 것이다. 생산자의 이름이 자루에 적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와인과 비교하면 한참 늦다. 프랑스가 마을과 밭의 이름을 법으로 보호하는 원산지 통제 명칭 제도를 갖춘 것이 1935년이니, 커피는 그보다 60년 넘게 지나서야 같은 일을 시작한 셈이다.
그사이 한국의 풍경도 바뀌었다. 국내 볶은커피 시장은 최근 6년간 해마다 평균 15.8%씩 커졌고, 같은 기간 인스턴트와 커피믹스는 조금씩 줄었다. 그만큼 원산지, 가공법 등 한국 소비자의 커피 취향도 조금씩 세분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커피 이름을 읽으면 취향이 보인다

출처 : newsroompanama
2026년 30회 베스트 오브 파나마 대회에서는 라마스투스 가문의 엘리다 에스테이트가 게이샤 워시드 부문 1위에 올랐다. 96.25점이었다. 그리고 10월 23일부터 사흘간 파나마시티에서 월드 오브 커피가 열린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처음이고, 그 무대가 하필 커피를 만들어 온 나라다.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도 하루 앞선 22일부터 함께 치러진다.
나라 이름 하나로 팔리던 시절부터 1999년 브라질에서 처음 열린 경매, 그리고 다섯 개의 이름표로 구성된 한 줄의 주소. 이 글을 읽고 난 후 오늘 마시는 커피의 이름을 끝까지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땅에서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떻게 다뤄졌는지가 거기 전부 적혀 있다. 그 다섯 칸 중 어느 칸이 내 입에 맞았는지 기억해 두는 것. 취향은 대개 그렇게 쌓인다. 그 뒤로 따라오는 멋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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